프랑켄슈타인|냉정한 리뷰 (피조물, 괴물, 델 토로)

200년 넘게 살아남은 이야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히 오래된 고전 소설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SF와 괴물 영화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며, 인간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위험한 상상력을 처음으로 대중문화에 던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는 그 오래된 이야기를 가장 자신다운 방식으로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예상대로 그는 괴물보다 인간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공포 영화라기보다 창조와 책임, 그리고 누가 진짜 인간인가를 묻는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피조물

지금까지 많은 프랑켄슈타인 영화에서 피조물은 괴물에 가까웠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실패작이었고, 결국 공포와 파괴의 상징으로 소비됐습니다. 하지만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처음부터 다릅니다. 이 영화의 피조물은 단순한 괴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에 가깝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 던져졌고,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상처받지만 끝까지 인간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버린 창조자마저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빅터 프랑켄슈타인보다 피조물에게 더 감정이 이입됩니다. 이야기의 중심 역시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에게 이동합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인간다운 존재는 인간이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이야말로 델 토로가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꺼내 든 이유처럼 보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피조물이 인간성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언어를 배우고, 사람을 관찰하고, 관계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보여 줍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보다 외모를 먼저 보고, 그의 마음보다 존재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그는 끊임없이 밀려나고 거부당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이 영화는 괴물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괴물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증오와 두려움만 경험한다면, 그 결과는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요. 델 토로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조용히 던집니다.

괴물

프랑켄슈타인의 핵심 질문은 늘 같습니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델 토로의 대답은 생각보다 분명합니다. 이 영화에서 피조물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괴물은 그를 만든 인간들에 가깝습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을 극복하겠다는 욕망으로 생명을 창조하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존재를 책임지지 못합니다. 피조물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그는 공포를 느끼고 도망칩니다. 아버지가 되어야 할 사람이 가장 먼저 아들을 버리는 셈입니다. 생명을 만드는 것은 성공했지만, 생명을 책임지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후 벌어지는 비극 역시 비슷합니다. 피조물은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고 학대받으며 살아갑니다. 피해자는 분명 피조물인데 사람들은 그를 괴물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점점 역할이 뒤바뀝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인 척하고, 피해자는 괴물 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관객은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정말 괴물은 누구였을까.

사실 이 질문은 200년 전보다 지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낯선 존재를 두려워하고, 이해하기 전에 배척하며,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긋습니다. 그래서 프랑켄슈타인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낡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메리 셸리가 던졌던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만들어 낸 편견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델 토로는 괴물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무섭게 보이는 존재는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것이 프랑켄슈타인이 단순한 괴물 이야기가 아닌 이유이기도 합니다.

델 토로

사실 이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이면서 동시에 가장 델 토로다운 영화이기도 합니다. 델 토로는 오래전부터 인간보다 괴물에게 더 많은 애정을 보여 준 감독이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그랬듯 그의 영화 속 괴물들은 대부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프랑켄슈타인을 만든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했습니다.

델 토로는 이 이야기를 공포 영화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대신 외로운 존재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바꿔 놓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피조물에게 향합니다. 관객은 괴물을 두려워하기보다 이해하게 되고, 피조물의 분노보다 외로움을 먼저 보게 됩니다.

사실 델 토로 영화의 괴물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밀려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인간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며, 때로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합니다. 하지만 델 토로는 늘 그들의 편에 섭니다. 그는 괴물을 통해 인간 사회의 잔인함을 보여 주고, 인간을 통해 괴물의 순수함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는 종종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관객이 인간보다 괴물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랑켄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빅터 프랑켄슈타인보다 피조물에게 감정이 이동하고, 창조자보다 피조물을 응원하게 됩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마지막 선택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프랑켄슈타인 영화들이 복수와 파멸에 집중했다면, 델 토로는 용서에 집중합니다. 피조물은 창조자를 증오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끝내 그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피조물은 창조자를 뛰어넘습니다. 생명을 만든 사람보다 생명의 가치를 이해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괴물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 더 인간다운 존재인가를 묻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꽤 오래 남습니다.

마지막 한마디

《프랑켄슈타인》은 2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고전의 힘과 기예르모 델 토로의 개성이 만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괴물을 두려워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괴물을 만들어내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며, 끝내 가장 인간다운 존재가 누구인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단순히 영화 속 인물들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향합니다.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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